“그러면 영감님! 그에 관해 무슨 해법(解法)이 없을까요?”
“무엇보다 한발씩 물러나서 조정과 타협의 미덕(美德)을 발휘해야 지요… 바로 그것이 중용이나 중정(中正)의 미학(美學)이 아니겠어요…”
“문종은 죽기 전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어린 단종을 잘 돌봐 달라고 유언을 했어요… 그러나 수양대군은 그들이 경거망동하게 국사를 농락(籠絡)한다고 여겼지요… 그래서 수양대군은 그들을 무력(武力)으로 제거하였는데 그것이 계유정난이지요… 그 사건 후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임금에 올랐으니… 누가 봐도 쿠데타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천학은 그 정변(政變)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져볼 만큼 그 역사정보에 정통하지 못하다.
첫째는 계유정난은 누가 언제 일으켰나?
“수양대군의 거사는 1453년 계유년(단종 1년) 10월 10일 밤이었지요… 그날 밤 단종에게서 아무런 윤허도 받지 않고 무력으로 김종서·황보인·안평대군 일파를 죽였지요… 그러니까 그 성격은 왕실 쿠데타(Coup d`etat)라고 봐야지요.”
둘째로 수양대군이 왜 단종의 왕위(王位)를 넘봤나?
“단종은 1441년 문종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불행히도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돼 죽었지요… 그러자 1452년 단종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때 단종은 12살에 불과하여 왕권이 급속히 약해졌고… 결국 숙부(叔父)들간 권력다툼이 시작된 거지요.”
셋째로 과연 수양대군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은 무엇인가?
세조실록이 주장하는 거사공의(巨事公義)는 이러하다.
‘김종서·황보인은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권세를 희롱하고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아니하고…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자라서 장차 불궤(不軌)한 것을 도모하려하니… 그 화(禍)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충신·열사가 대의(大義)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라….’
바로 김종서, 황보인 등이 국정을 희롱했다는 거다.
전사(戰史)를 뒤져보면 출정(出征)하기에 앞서 장수(將帥)들은 가끔 그 전의(戰意)를 돋구기 위해 명언을 남긴다.
당시 수양대군은 계유거사(癸酉巨事)에 앞서 일부 장졸(將卒)들이 겁에 질려 동조하기를 주저하자 이렇게 일갈했다.
‘지금 이 한 몸에 종사(宗社)의 이해가 매였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대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라…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
하여간 이 전투성어(戰鬪成語)는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의 황산벌 전투 명언을 능가할 거다.
무려 5만명의 나·당연합군이 황산벌로 협공해오자 겨우 5000병력에 불과한 계백장군은 처자식의 목을 베고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며 이렇게 전의(戰意)를 다졌다.
‘살아서 적(敵)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넷째로 수양대군이 거사(巨事)에 돌입할 때 부하장졸들이 바로 동조를 하였을까?
“처음에는 그러하질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수양대군은 먼저 단기필마로 김종서의 집(돈의문 근처)으로 달려가 그를 암살(暗殺)하였어요… 그가 출정(出征)하기 전 갑옷을 입힌 것도 그 부하들이 아니고 그의 부인 정희왕후였어요… 그러니까 장졸들은 김종서가 죽자 그때부터 동조하였어요.”
다섯째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성공시키려면 무엇보다 경복궁을 장악해야 했을 텐데 그것은 어떻게 했나?
“수양대군은 단종의 어명(御命)이라고 속여 야밤에 궁궐로 대신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리고 그때 영문도 모르고 입궁(入宮)하는 대신들을 죽인 거지요… 그때 흥례문(중문)에서 조극관·황보인·이양 등이 죽었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쫓겨 가서 얼마 안 돼 죽었어요.”
바로 그것이 계유정난의 전모이다. 우리 역사는 계유정난으로 한꺼번에 조선의 두 대인(大人)들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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