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이 천학의 재주로는 그 감동을 아무리 무슨 말을 동원해도 감당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이 우학(愚學)은 그 두 전각의 스케일에 후한 점수를 주자는 게 아니다. 조선의 극적 역사를 두 대전각에서 발견해 보려는 것이 핵심 코드(cord)가 되어야할 거다.
이제부터 두 전각의 비사(秘事)를 찾아 여행을 떠나볼 터이다.
여하튼 답사루트의 첫 화두는 수정전(修政殿)이다. 그러나 절반의 답사꾼들은 수정전을 대충 그냥 지나치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곳에서 무엇이라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거냐?
“세종 때 집현전이 이곳에 있었어요… 여기서 1443년 훈민정음 창제가 이루어졌어요… 그러니까 성삼문·하위지·정인지 등 학자들이 여기서 근무했지요… 그러나 세조는 그 학자들의 일부가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었다며 1456년(세조1년) 폐지하였어요… 그 후 홍문관이 들어섰다가 임진왜란 때 불탔고요… 월대 하단부를 잘 봐요 하마비(下馬碑)까지 설치되어 있잖아요… 지날 때는 말을 탄 사람은 누구라도 내리라는 뜻이지요… 그만큼 수정전의 위엄을 말해주는 거지요.”
사실 그 비문의 공식 명칭은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이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궁궐 구역내에서 말을 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그것은 궁궐유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이 전각은 조선 초기의 석학들이 근무하던 곳이라 그러한지 그 규모가 큰 편이다.
“당초 이 전각규모는 여러 동(棟)으로 무려 200여 칸이 넘었어요… 원래는 사정전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었고요… 수정전 좌·우측 월대(月臺)측면에서 이음새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요.”
아무튼 당신의 통찰력으로 수정전의 그 품계언어(品階言語)를 발견하면 그 숨겨진 권세(權勢)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거다. 궁궐 전각은 무엇보다 건물 칸수와 월대 여부 그리고 품계 접미사(接尾辭)가 그 위신을 장담하여 준다.
정전 근정전이 25칸, 경회루가 35칸인데 수정전은 무려 40칸이나 되고 수정전은 근정전과 같이 월대(月臺)가 조영되어 있으며 접미사로 전(殿)자를 붙여줬기 때문에 그 위상이 예사가 아님을 말해준다.
“대원군은 고종 4년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그때 이름을 수정전(修政殿)이라 정했어요… 말 그대로 정치(政治)를 수리(修理)하자는 뜻이죠… 그걸 보면 대원군은 이미 정치개혁의 야망을 품었던 것으로 봐야지요.”
실제로도 1867년 고종의 경복궁 낙성식 축문(祝文)은 그걸 잘 암시하고 있다. 수정전(修政殿)이라 작명한 것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은 조선정치를 대거 수리하려던 조선판 문화혁명(文化革命)이다. 그러니까 향후 조선정치의 대변혁(大變革)을 수정전이 예고한 셈이다.
하여간 노영감은 조선말기의 역사를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갔다.
“조선 패망의 징후는 따져보면 1876년 조·일간의 강화도조약을 맺은 때부터이지요… 그 조약으로 인천·부산 등 개항이 되자 친일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했어요… 이때 개화파는 구식 중앙군대 조직 5영(營)을 2영(營)으로 대폭 축소했어요… 그러니까 훈련도감(직업 상비군), 어영청(효종 때 북벌주도), 총융청(경기도 남양주시 수비), 수어청(남한산성 수비), 금위영(궁궐수비)에서 “무위영·장용영” 2영(營)으로 통폐합한거지요… 그리고 구식군대를 형편없이 대우하였어요.”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원인이 된거다.
“구식군대에는 급료(給料)도 몇 달씩이나 주지 않았는데… 무위영 산하의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은 후대를 하였지요… 이에 분개한 구식군대가 1882년 6월 9일(고종19년)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사실 임오군란이 조선정치에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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