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조선의 망국(亡國)을 재촉한 사건은 무엇보다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일 거다.
왜냐하면 청·일 양국의 군대가 동학군(東學軍)을 진압한다며 동시에 조선 땅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동학농민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며… 무장한 농민들이 파죽지세로 전주·구례·공주 등 삼남지방을 장악해가자…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청국에 진압을 요청하였어요… 이에 대항하여 일본군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며 조선에 군사를 투입하였지요.”
결국 청일양국이 한반도에서 그 세력(勢力)을 확장하려다 군사적으로 부딪치게 되었는데 그것이 청일전쟁(淸日戰爭)이라는 것은 이미 아는 바이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군국기무처가 조선정치의 주도권을 잡아간 거다.
“그 후 친일파·친러파 등이 서로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 대립하며 제 1·2·3차 내각(1894년 7월~1896년 2월)을 끌어갔어요… 그 내각의 중심인물은 친일 개화파 김홍집이었어요… 당시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은 아주 혁명적이었지만 수구파(守舊派)들에겐 치명적이었어요.”
그 개혁조치가 바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다.
내가 구태여 갑오개혁을 수정전 답사에 때맞춰서 말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 바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수정전(修政殿)에서 출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영감의 강의 중에는 심히 이 천학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있었다.
“뭐요? 영감님! 일본군이 고종을 협박(脅迫)했다고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하여간 나는 노교수의 말꼬리를 잡아 불쑥 그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영감의 인내심은 거기서 참기 어려웠는지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 사건을 알면 분통(憤痛) 터질 거요… 왜 되풀이하여 그런 수모(受侮)를 당하는지…”
영감은 그 협박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갔다.
“바로 일본정부가 1894년 6월1일(고종31년) 조선에 내정개혁 5개조를 강요했는데… 고종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대안으로 교정청(校正廳)을 만들려 했어요…”
고종이 독자적으로 개혁을 하려한 거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경복궁에 같은 해 6월21일에 군대를 투입하여… 대포, 소총 등 병장기(兵仗器)를 모두 빼앗아 무장(武裝)을 해제하고 이어 고종을 협박하였지요.”
결국 조선정부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는데 초대 총리대신이 김홍집이다.
여하튼 조선말 일본군 경복궁 무장침투 사건은 야담(野談)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이다. 그러나 이 천학이 그러한 민족적 수모사건을 들춰내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바로 조선왕조의 3대 수모사건(受侮事件)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선조가 야밤에 의주로 도망간 사건이 첫째 수모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결국은 삼전도(三田渡: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 앞에 ‘고두삼배(叩頭三拜)’ 한 사건이 둘째 수모라 한다면… 이 사건은 셋째 수모이다”
그러나 조선말 개혁화두로써 아무래도 기억해야 할 것은 역사가 갑신정변(1884년)-갑오개혁(1894년)을 어떻게 보느냐이다.
우선 고종 실록에서 갑오개혁의 목록을 뒤져보자.
제2차 김홍집 내각의 홍범14조(洪範十四條:1895년)가 그 핵심이다.
‘왕실과 정부의 사무분리, 은본위 화폐제도,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신분제 철폐, 고문과 연좌제 폐지, 조세법정주의, 연도예산제도 도입, 지방관리 직권제한, 문벌타파와 인재등용, 태양력 채택, 연호 ‘건양(建陽)’ 제정, 소학교 설치, 단발령 시행 등등….’
그 개혁과제를 듣기만 해도 당시 보수정객(保守政客)들은 소름이 끼칠만한 중대사들이다. 아마 천지개벽(天地開闢)이란 말은 괜히 생긴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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