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과연 ‘연산군(燕山君)’은 누구이더냐?
흥청망청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 폐주(廢主)의 이력서부터 알아야 할 거다.
‘연산군은 성종의 왕자로 폐비 제헌왕후 함안 윤씨에게서 1476년 11월7일 태어났다… 성종이 1494년 승하하자 19세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이 됐다… 1498년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를 도륙(屠戮)하고… 1504년에는 당시 훈구파 정객 임사홍한테 술판에서 생모 윤씨 사사사건(賜死事件)의 전말을 듣고… 김굉필·정창손·정여창 등 여러 신하를 학살했다.’
바로 그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 연산군(燕山君:재위 1494~1506년)은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년)과 함께 조선의 2대 패악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악정(惡政)은 하도 많아 전부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언문교육 금지, 원각사(圓覺寺) 폐찰, 성균관 유흥장화, 사간원 기능 중지, 경연폐지, 채청사(採靑使)와 채홍사(採紅使) 설치 등등….
그렇다면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유래는 무엇이더냐?
“연산군은 그 성정(性情)이 본디 학문을 싫어하고 음행(淫行)을 즐겼어요… 특히 각 지방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녀들을 뽑았어요… 그 미녀들을 기생으로 채용하였고… 나중에는 그 기생의 호칭을 운평(運平)이라고 바꿨고요… 운평 중 궁중에 뽑혀오면 흥청이 되는데… 그 흥청중 임금과 만족스럽게 잠자리를 하면 천과흥청(天科興淸)… 그렇지 못하면 반천과(半天科)라고 부르고… 아예 임금과 잠자리도 못하면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나 이 천학이 경회루에서 느닷없이 고사성어 ‘흥청망청’을 얘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누각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경회루 연못에서 종종 그런 흥청들과 유흥을 즐겼어요… 심지어 1506년 경회루 연못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그 곳에서 흥청들과 뱃놀이를 즐겼어요… 그러다가 연산군은 중종반정(1506년 9월)으로 쫓겨났지요.”
흥청과 놀아나다 나라가 망(亡)한 거라는 비유에서 ‘흥청망청’이라 한 거다.
연산군이 경회루를 한 때 유흥장(遊興場)으로 타락시켰다하여 그 조영(造營)의 본래 의도까지 망가뜨릴 수는 없는 거다.
태종의 낙성식 어록(語錄)은 그걸 잘 암시하여 준다.
‘내가 이 누각(경회루)을 중국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慰勞)하는 장소로 삼고자 한 것이지… 내가 놀거나 편안히 하자는 곳이 아니다… 경회루(慶會樓)는 벼슬들이 그저 경사스러운 날에 회합하는 곳이 아니라 옳은 사람을 얻어야 비로소 경회할 수 있다.’
여하튼 경회루의 용처(用處)를 두고 오늘날 그 시시비비가 자주 벌어진다.
국제행사가 있을 때 관계 당국은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자랑할 수 있다며 경회루에서 경축연회를 베푸는 일은 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 갑설(甲說)이고, 고궁에서 경망스럽게 어찌 잔치판을 벌릴 수 있느냐며 절대 연회장(宴會場)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을설(乙說)이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여론(與論)은 후자 편에 더 쏠려있는 듯하다. 그러나 원래 현대판 여론(與論)이란 조석(朝夕)으로 변덕을 부리는 지라 그것이 반드시 정론(正論)은 아닐 게다.
특히 문화재를 박물관의 박제곤충처럼 그저 보존해야 한다는 관념은 시대착오적으로 자칫 문화재의 부가가치를 사장(死藏)시켜 버릴 수 있다. 여하튼 이 천학의 견해(見解)를 말하려면 원래 경회루는 당초 건립취지에 합당한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유료(有料)로 개방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궁궐음악회, 궁궐박람회, 궁궐전시회 등은 오히려 궁궐의 부가가치를 고양시킬 거다.
사실 북경 자금성, 베르사이유 궁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로마 원형 경기장 등도 보존과 이용을 함께 조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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