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시피 이것은 함원전의 청기와 파편(破片)이지요… 이 전각은 세종 때에 왕의 침소(寢所)로 지었고 문종이 거처했어요… 청기와 지붕이었어요… 번와소(燔瓦所)에서 명나라 염료와 기와 기술자를 초빙하여 만들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서 고종 때 다시 지었는데 아쉽게도 그때 그냥 잿빛기와를 썼지요… 광해군 때 청기와 기술이 끊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정반대의 이설(異說)도 있다.
여하튼 옛날에는 청기와는 아주 귀한 전각에나 사용했는데 그걸 증명하는 것이 바로 창덕궁 편전 선정전(宣政殿)이 청기와라는 사실이다.
“청와대는 고려 때 개경의 이궁(離宮)이었어요… 조선 개궁(開宮) 후 경복궁이 창건되었을 때는 후원이었어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고 고종 5년(1868년)에 복원되었어요… 그때 중일각·오운각·융문당·융무당·경무대·춘안당 여러 건물이 지어졌고… 과거장, 관농장(官農場), 연무장(鍊武場)으로 사용했어요.”
이 정보가 경무대(景武臺)와 청와대(靑瓦臺)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을 거라는 근거이다.
그러나 경무대와 청와대의 작명사(作名師)는 해방 후에 다시 시작된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그 건물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경무대(景武臺)라 했지요… 그 이유는 조선시대 이곳에 경무대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1960년 4·19혁명 후 윤보선 대통령은 그 이름을 청와대로 바꿨어요…그건 본관 2층 석조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씌웠기 때문이었지요… 바로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저를 지을 때… 그들도 청기와가 귀한 것이라는 걸 알았지요.”
그러나 청와대 얘기를 한차례 더 확장하여 그 접미어 ‘대(臺)’에 관한 논쟁을 벌여보고 싶다. 청와대(靑瓦臺) 이름에서 과연 ‘대(臺)’가 합당하느냐이다. 두괄식(頭括式)으로 먼저 말하면 청와대(靑瓦臺)라기보다는 청와원(靑瓦園) 또는 청와성(靑瓦城)으로 고쳐 쓰면 어떠할까! 그 이유는 이러할 거다.
그 첫째는 원래 대(臺)는 그 의미가 장독대, 무대, 백운대에서 보듯 평평하되 높고 좁은 곳을 가리키는데 청와대는 그 범위가 매우 넓으며 실제로도 그 입지가 서울 성곽아래 있고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둘째는 중국 명·청 황궁은 자금성(紫禁城)으로 말하고 또는 황실 별원(別園)은 이화원으로 칭하고 일본도 오사카성(大阪城), 나고야성(名古屋城)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셋째는 규모의 위계 질서상 대(臺)는 성(城)·전(殿)·당(堂)·누(樓)·관(館) 등보다 훨씬 하등개념(下等槪念)인지라 그 품격에도 합당하지 못 할 터이다.
그러나 함원전 답사를 마치기 전 답사객의 흥미거리고 꺼내야 할 화두가 있다. 중전우물과 연루된 궁중야화(宮中野話)이다.
“함원전 후미에는 중전(中殿)께서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제법 잘 꾸며져 있어요…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은 궁녀들이 임금과 동침(同寢)하기 전후에 그 샘물로 몸을 씻었다는 것이죠.”
그러하니 궁녀(宮女)들의 환희와 좌절이 서려있는 곳이다.
“우물가에는 세종대왕이 앵두나무를 관상용으로 심었다지요… 앵두가 열리면 세종은 그걸 따서 세자(문종)와 함께 먹으며 정을 나눴데요.”
이제 우리 일행은 강녕전과 함원전 학습을 여기서 마무리하고 교태전(交泰殿)으로 가야겠다.
우선 교태전의 학습 키워드(Keyword)가 무엇이더냐?
무엇보다 교태전(交泰殿)의 말감은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찾아야 할 거다. 구중궁궐이란 그 말 뜻 그대로 아홉 대문을 거쳐야 한다는 거다. 경복궁의 복잡한 회로(回路)에서 종점이 어디인지 그걸 따져봐야 그 의미를 해명할 수 있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문(사정전)→향오문(강녕전)→양의문(교태전)
여기서 여섯 대문을 넘고 전각을 세개 통과해야 할 터이니 구중궁궐이 틀림없다. 여하튼 교태전의 건축개관(建築槪觀)을 대강이라도 알아야 그 곳이 얼마나 깊고 은밀한 곳인지 알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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