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팔상전을 본 딴 듯 사원(寺院)같기도 하고… 일본 황궁(皇宮)을 흉내 낸 것 같아 왜색풍(倭色風)이 나는 것도 같고… 거대한 체구와 우뚝 솟은 대축(大築)은 영 어울리지 않는데….’
그렇다면 대관절 저 건축물이 무엇이더냐?
엉뚱하게도 그 건물을 보며 갑자기 흥분을 한 분은 바로 동행한 ‘노객(老客)’이었다.
“원래 저 건물자리는 문소전(文昭殿)이 있었던 곳이죠… 문소전은 태조 이성계의 본처 신의왕후 한씨의 혼전(魂殿)이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고종 때 어렵게 다시 지었는데… 글쎄 일제강점기 또다시 그걸 훼철(毁撤)을 했거든요… 정말 분통터질 노릇이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더 큰 실망은 해방 후 현대판 관리들은 그걸 복원하기를 아예 포기했다는 점이다.
“글쎄 박정희 정권 당시 1972년 거기다 덜커덩 국립 박물관을 지었거든요… 그러다가 1993년 이후부터는 국립 민속박물관이 되었고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우리 정부가 또 한번 궁궐을 훼손한 셈이다.
그러나 이 천학(淺學)의 문소전 확장코드(Cord)가 재미가 있으려면 아무래도 그 확대경을 그에 연루된 태조 이성계의 ‘러브스토리(Love Story)’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그 로망스(Romance)는 모두 다큐멘터리라는 거다.
“원래 이성계는 향처(鄕妻)로써 본처인 신의왕후(한씨부인:1337년~1391년)가 있었는데 8남매(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경신공주·경선공주)를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태조 즉위 전(1391년)에 죽었지요… 경처(京妻)로써 후처인 신덕왕후(강씨 부인)가 있어 3남매(방번·방석·경순공주)를 두었는데 그 왕후 또한 젊은 나이로 1396년에 요절을 하였고요… 그러니까 처복(妻福)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신덕왕후에 대한 러브스토리(Love Story)는 엉뚱하게도 청계천 광통교까지 확장돼 있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애처(愛妻)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죽자 몹시 상심하였어요… 그러한지라 태조 이성계는 부인의 혼(魂)이나마 멀리 보낼 수 없다며 능지(陵地)를 도성(都城) 안에 두기로 했어요… 그러나 능원(陵園)은 원래 도성(都城) 밖 사방으로 100리 안에 조영하고… 도성 안에는 능원을 쓸 수 없는 것이 당대의 법도(法度)였어요… 그래서 신하들은 그걸 몹시 반대했지요.”
그러나 대소 신하들도 태조 이성계의 결심(決心)을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그 왕후의 능을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쓰고 원찰(願刹)로 흥천사를 세웠어요… 그리고 그 절의 새벽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을 들었다고 하지요.”
정말 태조 이성계하면 그 출신이 무장(武將)이 아니던가! 그런 장수가 어찌 죽은 부인을 그렇게 잊지 못했을까?
여하튼 이 천학(淺學)은 그 옛날 정릉(貞陵)이 있던 광화문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태조 이성계의 러브스토리에 동화되어 봤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사랑의 상처(傷處)가 깊어져 간 것은 그의 본처 소생 이방원이 1400년에 태종이 되고 나서이다.
“태종과 그의 추종자들이 1409년 신덕왕후 능을 이전한 거지요… 바로 대소신료들은 1405년부터 천릉(遷陵)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요… 능원(陵園)의 조영원칙에 어긋나고 중국사신(使臣)이 묵을 모화관을 지어야 하는데 그 터가 없고… 그 주장에 밀려 지금의 성북구 정릉으로 옮겼지요.”
중구 정동(貞洞)의 유래도 여기서 연유한 거다.
그러나 천릉(遷陵)을 단행한 태종의 속셈은 임금이 된 후 경복궁에서 집무하는지라 그 곳에서 계모의 능을 빤히 바라봐야 한다는 건 참을 수가 없었을 거다. 그걸 입증하는 것은 정릉의 천장(遷葬)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의 조흥은행 본점 앞 청계천에는 원래 토교(土橋)가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그 다리가 떠내려가 사람이 빠져죽었어요… 그러자 태종은 웬만한 물난리에도 견디게끔 넓고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命)을 내렸어요… 그러나 의정부에서는 쓸만한 교량 석재(石材)를 구할 수가 없자… 태종에게 마침 신덕왕후 능을 천장(遷葬)한 후 근방에서 나뒹굴던 석물(石物)을 발견하고 그 석재를 쓸 수 있도록 윤허를 받은거지요… 그리고 1410년(태종10년)에 그 석물로 광통교를 축조했어요.”
지금도 광통교에는 그 신장석(神莊石)이 그대로 있어 그걸 증거하고 있다. 그것이 광통교(廣通橋)의 유래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천릉(遷陵)사업에 대한 역사의 진실코드를 찾아보는 거다.
‘과연 태종 방원은 어떤 권세(權勢)로 광통교의 자재로 그의 계모 신덕왕후의 능석물을 사용하는데 동의하였을까? 당시는 유교가 국정이념일 텐데… 더구나 능 이장(移葬)을 주도한 자들은 태조 이성계가 키워준 개국공신들이었다는데…’
“그 신장석 표면에는 연꽃·당초문양과 함께 좌불(座佛)인지 보살(菩薩)상인지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교량 부재로 사용하면서 증오의 표명인지 그 신장석을 거꾸로 세웠지요.”
정말 인간의 분노는 부처상(또는 보살상)을 거꾸로 세우는 데까지 뻗쳐있는 건가! 현재 광통교의 신장석 중 무려 4기가 거꾸로 시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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