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님! 저기 저 전각이 바로 동궁인가요?”
그 동궁전(東宮殿)은 경복궁 중앙 어축선상(御築線上)에서 동쪽으로 비껴 있다. 그래서 자칫 초행 답사꾼들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만일 그 신상명세서를 학습한다면 그러할 수는 없다.
“동궁전(東宮殿)이란 세자가 거처하는 소궁전(小宮殿)을 말하지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따라 동쪽에 뒀기 때문에 동궁이지요… 궁궐 중앙의 왕비궁(王妃宮)을 중궁전(中宮殿)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여하튼 우리 일행이 처음 당도한 곳은 동궁문(東宮門)이었다. 초입부의 정문 삼비문(三備門)을 지나 중광문(重光門)→진화문(震化門)을 거쳐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으로 들어섰다.
우리 일행이 삼비문을 지났을 때 제일 먼저 자선당(資善堂) 편액이 눈길을 끌었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 일거다.
그 자선당은 세종 9년(1427년)에 건립되었는데 문종 등 여러 왕자가 그 곳에서 군왕수업(君王修業)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자선당이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년)에 다시 재건되었으나 1919년 일제 때 박람회장을 마련한다며 철거하였다. 현재 건물이 다소 고색창연한 맛이 떨어지는 것은 1999년에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세자들은 동궁(東宮)에서 어떠한 군왕수업을 받았을까?
첫째 학습과제는 세자(世子)는 어떻게 책봉되고 임금에 올랐을까?
왕통계승에 혈통을 중시했을까 아니면 능력을 우선했을까?
동행한 노영감은 조선의 세자책봉을 이렇게 강론했다.
“역대왕조는 장자상속(長子相續)의 원칙을 도모하려 했어요…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이렇게 법령으로 정했어요.”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子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長子)가 불초(不肖) 할 때는 인망(仁望)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조선왕위에서 적자승계(嫡子承繼)의 원칙을 도모하려했던 군주는 세종대왕이시다.
1392년 조선 창업 이후 태조→정종→태종→세종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왔지만 단 한차례도 왕권이양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그런 문제를 일찍이 깨달았는지… 적자적손(嫡子嫡孫) 문종(재위:1450년~1452년)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시켰어요… 그러나 문종은 병약(病弱)하여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그의 적통대군(嫡統大君) 단종(재위:1452년~1455년)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분마저도 숙부 수양대군에게 빼앗겼지요.”
여하튼 그 후 군주(君主)들도 적자적손(嫡子嫡孫)의 왕통계승의 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천학이 감히 후궁 자식들이 임금이 됐다는 사실을 일부러 폭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시각(視覺)을 바꾸어 보면 왕실 서자(庶子)도 군왕(君王)이 될 수 있다는 증거일 터이니 그리 주저할 것은 아니다.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 ‘후궁 인빈 김씨’의 손자 능양군이며… 20대 경종은 숙종 ‘후궁 장희빈’의 소생이며… 21대 영조 역시 숙종 ‘후궁 최숙빈’의 소생이며… 23대 순조는 사도세자 아들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이며… 25대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궁 자손’이다.
사실 세자책봉(世子冊封)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일인지는 청나라 제5대 옹정황제가 고안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을 보면 알 수 있다.
“황제가 생전에 황태자 이름을 써서 홀갑(笏匣)안에 밀봉(密封)하지요… 그리고 건청궁(乾淸宮) 옥좌 뒤의 편액 정대광명(正大光明) 후편에 그 홀갑(笏匣)을 숨겨놓았다가… 황제가 서거(逝去)하면 그 홀갑을 열어 태자(太子) 이름을 확인한 후 바로 황제에 오르는 거지요.”
여하튼 그 제도로 청나라 황제가 된 분이 제6대 건륭황제(재위 1735-1795)이다. 바로 군주계승의 원칙은 ‘능력주의’에 입각한 시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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