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凡 김구의 꿈, 민족의 꿈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2-25 19: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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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기(한나라당 노원병위원장) {ILINK:1} 다양한 연령층을 막론하고 한국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반드시 상위에 거명되는 사람이 白凡 金九다. 그러나 백범을 왜 존경하느냐, 그가 무엇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계속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다문다. 기껏해야 독립운동가니까,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고, 해방 후 남북 합작을 시도한 민족주의자니까,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는데 그 이상 깊이 있는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백범의 지속되는 인기에는 거품이 들어 있다. 또 한편으로 백범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저평가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알고 있는 수준보다 과장 평가되거나 아니면 실제보다 저평가 되고 있다는 것은 곧 백범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 민족의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고, 나아가 민족의 미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척도임을 암시해 준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백범은 미국 OSS와 함께 한국 청년으로 이루어진 한국 본토 상륙부대를 편성하여 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준하도 그 대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부대가 제주도나 서해 일대의 해안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교전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해방시켰다면, 그 후 신생 대한민국의 상황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남북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질곡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과 그 후의 처리문제는 고스란히 강대국들의 잔치였다.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는 노정객의 눈물은 그런 통한과 예견되는 민족사의 불운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백범의 예상대로 진행돼 갔다. 남북 양쪽에서 권력 게임에 돌입한 공산진영과 우익 세력은 겉으로는 ‘통일 한국’을 구두선으로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별도의 통치 조직을 완료하고 정부 수립을 서두르고 있었다.

백범은 여기에 항거한다. 1948년 초 유엔 총회가 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자, 이에 백범은 유엔한국위원단에 편지를 보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어떻게 하든 남북 분단과 외세에 의한 대립을 극복하고 자주적 통일국가를 출범시키려고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 절정은 평양방문이었다. 이미 남북 양체제 출범은 돌이킬 수 없는 국제역학의 산물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홀로 외로이 저항하는 백범의 기개는 ‘순수한 열정’ 그 자체였다.

백범이 지금까지 사랑받고 추앙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바로 통일 열정의 ‘순수성‘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통일을 구두선으로 외치면서 권력 장악과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순수하지 못한 ’통일 일꾼들‘에 대한 혐오감은 백범의 이 순수한 민족 사랑과 대비되어 더욱 굴절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친다.

그는 1949년 육군소위로 첩보원이었던 安斗熙의 총탄을 맞고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갔다.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는 것은 백범이 공산주의자들과 회담을 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사실을 놓고 그 ‘순수한 열정과 민족사랑’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 현실을 모르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상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결국은 공산체제를 굳혀주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질책도 따른다. 백범이 과연 공산주의자들을 몰랐을까. 아니면 ‘공산주의로 통일이 되어도 좋으니 통일만 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통일지상주의의 원조(元祖)격이었을까.

임시정부 시절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백범에게 임시정부 내에 공산주의 사상을 심고 후일 독립하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힘을 합치자고 제의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백범의 대답은 ‘공간국가가 되면 소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은 진정한 자주 독립국가가 될 수 없다.’고 반대를 분명히 했다.

백범은 스탈인 체제의 소련을 멀리서 보면서 ‘저건 아니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보다 몇 배나 더한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보면서도 ‘주체사상’을 흠모하고 민족공조를 외치는 오늘날의 눈 먼 통일지상주의자들과는 뿌리를 달리한다.

임시정부를 독단적으로 운영하지 않고 집단 지도체제를 구축하여 탈 없이 이끌어 온 지도력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백범을 단순한 이상주의자이거나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로 치부하는 것은 그를 정적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백범의 평양행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원로 정치인 한 사람은 회고록에서 ‘한국의 대통령들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자마자 대통령 병에 걸린다’고 했다.

이런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백범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통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보다 정치 공학적 책략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범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 꿈은 아직도 민족의 꿈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백범이 여전히 살아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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