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때문에 싸우는 꿈이다. 주로 기획예산처 장관과 싸우는데, 다른 부처 장차관이나 국장이 상대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빛과 그늘 가운데 보건복지부는 주로 그늘을 살피는 일을 맡고 있기에, 과천 청사 보건복지부 장관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눈물과 회한, 슬픔과 절망으로 넘쳐 흐른다. 이곳에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씨앗을 뿌려 기쁨과 용기를 싹 틔우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것이 바로 돈이다.
보건복지부는 돈을 많이 쓰지만, 그래도 돈이 언제나 부족하다. 내가 과천에 온 뒤로 돈 때문에 싸우는 악몽을 새로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기획예산처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보건복지부에 예산을 적잖이 빼앗긴 부처 공무원들에게는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천박한 신자유주의 사조에 휘둘린 정부가 부와 소득의 양극화를 조장해 서민의 삶이 파탄에 빠졌다는 지식인들의 질타가 날마다 귀를 때린다. OECD 평균에 비해 너무 낮은 공적 사회지출을 근거로 삼아 참여정부의 복지정책이 오히려 후퇴했다는 비난도 들린다. 장애인 단체나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이 보건복지부 장관 물러나라고 요구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우리 국회와 정당,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거대한 ‘국민사기극’ 또는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과 장애와 소득 없는 노후라는 시련에 직면한 국민들의 절절한 사연을 거론하면서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타한다. 그러나 돈 없이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거의 모두가 눈을 감는다.
한나라당은 시행 첫 해에 11조원이 넘는 재정이 투입되어야 할 기초연금제 법안을 발의하면서 동시에 국민들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지난해 정기국회에서는 민생파탄론으로 정부를 공격하면서도 노인과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비를 1천억원이나 삭감해 도로건설 등에 투입했다.
민주노동당은 해마다 2천억 원 넘게 들어갈 6세 미만 아동 무료예방접종을 시행하도록 하는 법률을 발의해 통과시켰노라고 자랑하면서도,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담배값 인상에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으며 다른 재원조달 대책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마치 정부가 일부러 예방접종사업을 포기한 것처럼 비난한다. 신문시장을 압도하는 보수신문들은 국민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하려는 정부의 모든 노력을 ‘작은 정부론’으로 공격한다. 1면이나 사회면에는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양극화 기획기사를 실어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오피니언 페이지는 ‘세금폭탄’과 ‘큰정부’를 비난하는 사설과 칼럼으로 채워넣는다.
진보를 표방하는 신문들은 정책담론 공방에서 그렇지 않아도 열세에 처해 효과적인 정책수단을 확보하지 못하는 정부를 ‘신자유주의’로 몰아 공박한다. 정부지출의 증가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정책의 실시를 요구하면서도 세입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수단에 침묵하거나 심지어는 반대한다.
아마도 어떤 언론사들은 이 칼럼에 대해 보도하면서 보건복지부장관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또 언론탓만 한다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정부와 공직사회가 일을 다 잘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도 많은 혁신을 했지만 낭비를 줄이고 재정지출을 합리화하는 일에 더 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관행에 얽매이지 말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실천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공직사회의 특권과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해 더욱 더 솔직하게 반성하고 혁신해야 한다. 그러나 교정해야 할 정부의 오류가 아직 숱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탓만 한다는 비난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말한다. 이제 이 소모적인 국민사기극을 걷어치워야 한다. ‘작은 정부론’을 옹호하는 정치인과 언론인, 지식인들은 정부지출의 증가를 동반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정부지출의 증가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과 언론인, 지식인들은 그 재원을 확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말하는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개인과 사회의 책임 분담에 대한 철학이다. 모든 문제는 개인의 책임인 동시에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보수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진보는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보수는 상대적으로 작은 정부를 옹호하며 진보는 큰 정부 또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내 주장은 보수가 좋다거나 진보가 좋다는 게 아니다. 보수는 보수답게, 진보는 진보답게, 책임 있는 자세로 토론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국민이 어느 쪽이든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절충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