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 자녀가 다니는 학교 혹은 우리 지역에 소재한 학교가 한두 명을 보내는데 그쳤거나 아예 명단에서 빠졌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며, 그 학교 선생님들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학부모들을 피하고 싶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학부모들은 학교 측에 더욱 엄격하게 입시교육을 시켜줄 것을 요구할 것이며, 교사들은 눈 딱 감고 아이들에게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각 고등학교들은 명문대에 한두 명이라도 아이들을 더 진학시키기 위한 교육을 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럴수록 소위 명문대가 누리는 지위는 하늘을 찌르게 되고 초·중·고교 교육의 정상화보다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마음껏 입시전형의 칼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공교육 붕괴가 가속화되고 사교육비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한층 심각한 것은 40년간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하는 어느 국회의원이 이러한 심각한 줄 세우기를 막지는 못할망정 이런 자료를 입수하여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학부모와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못해 파렴치하다. 서울대는 “국회의원이 요구하는 자료이니 제출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해명한다.
지난해 국정감사를 준비하면서 나를 비롯한 교육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속을 가장 많이 태웠던 피감기관은 서울대였다. 자료를 요청하면 공문 한 장 보내며 자료제출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그랬던 서울대가 기자들조차도 서로 보도하지 말자고 약속할 정도로 민감한 자료를 국회의원이 요구했으니 제출해야 한다는 답변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대학이 되기 위해 뼈깍는 노력을 해야 할 서울대학교가 어느 고등학교가 몇 명씩 보냈는지 알려주면서 공교육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은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 ‘서울대 해체론’은 결국 서울대의 자업자득이다.
이런 와중에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대학’이라고 불리는 대학들은 2008학년도 입시전형계획을 내놓으면서 마치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정시모집의 절반을 수능만 입학전형에 반영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고려대는 아예 자기 학교의 모집단위별 수능 합격 안정권 점수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로서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입시개혁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말을 믿고 내신학업에 열중했던 학부모와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교육정책의 불신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언론의 관심은 다시 ‘주요’ 7개 대학 입학관리처장들의 모임에 쏠리고 있다. 교육부 한 관계자의 말은 그동안 기껏 설득해놨더니 입학관리처장들이 많이 바뀐 탓도 있다고 한다. 이제 수백만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주요’ 대학 입학관리처장들의 인사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웃지 못 할 코미디가 연출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자기들끼리 몇 차례 모여 회의하고 나서 카메라 앞에서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학의 자율성”을 운운할 모습을 상상하면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다. 그렇게 정부가 목 놓아 대학입시부담 경감을 외쳤는데 대학에서 되돌아온 메아리가 이 정도면 고등교육 정책에 대한 정부의 한계점을 분명히 내보인 것밖에 되지는 않는다. ‘고등교육 정책’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면 연간 수조원에 이르는 고등교육 예산은 차라리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한 초중등교육 현장을 위해 쓰이는 편이 나을 듯하다.
정부는 “전반적으로 보면 이전보다 학생부 반영 비중도 높아졌고 수능만 반영하는 비율도 전체 모집 인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고 애써 자위하는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4년에 발표한 정부안도 교육단체로부터 함량 미달이라는 지적을 받고 학생들의 학습부담 역시 여전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정부계획을 밀어붙이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정부계획대로 온전히 시행도 해보기 뒷덜미를 잡힌 입시 방안이 물거품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정부는 자율의 미명하에 대한민국의 교육을 망치는 대학들에 대해 지금처럼 끌려만 갈 것인지 아니면 행·재정적인 제재방안을 강구해서라도 입시개혁을 꾸준하게 추진할 것인지 분명한 자세를 선택해야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지금 초·중등교육의 정상화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위한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참여정부 입시개혁의 실패는 필연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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