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옥스퍼드가 그녀의 삶의 방향을 좌우했다면 대학생활을 옥스퍼드 학생보수협회의 멤버로 지냈을 것이다. 그녀로서는 화학공부보다는 보수협회의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협회의 행사에는 1학년 때부터 빠뜨리지 않고 참가했다. 협회에서 사람 손이 필요할 때 늘 그녀가 있었다. 협회에서 강사로 누구를 부를지 검토할 때도 그녀가 있었다. 협회의 임원을 선출할 때도 그녀가 있었다. 성실 그 자체인 학생으로서 화학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남는 시간의 대부분은 협회에 바쳤다.
그와 같은 열성이 인정 받아 보수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여성으로서 첫 회장이었다. 이후 그녀의 인생에는 종종 ‘여성으로서 처음으로’라는 형용사가 붙게 되는데, 옥스퍼드 학생보수협회 회장 취임이야말로 이 형용사가 붙은 최초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역사에 남을 만한 명 회장은 아니었다. 스타일은 땅딸막했으며 얼굴도 통통해서, 보수당의 리더가 된 후의 매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설은 명쾌했으나 청중을 사로잡을 정도의 박력은 없었다. 회장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녀가 1년간 더 회장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협회 일에 대한 열성 때문일 뿐이었다.
회장에게는 협회가 초청한 저명한 보수 정치가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특권이 있었다. 협회가 정치가를 불러 강연을 들을 때, 협회 비용으로 런치 모임이나 디너 모임이 열리게 된다. 그때 회장이 정치가의 옆에 앉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옆에 앉은 정치가와의 대화에서 마가렛은 정치가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자세히 배웠다.
조직을 움직여 하나의 일에 부딪쳐가는 정치가로서 필요한 통치 기술도 여기서 배웠을 것이다.
학생들의 클럽에서는 자금 모으기도 겸해서 매년 ‘볼’이라는 대 무도회를 여는데, 마가렛이 회장을 맡아 보는 동안 학생협회의 대 무도회는 언제나 성공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협회라는 조직을 그녀가 능숙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대 무도회는 성공했으나 그녀 자신의 댄스는 높은 수준은 되지 못했다. 협회의 재정부장 에드워드 보일은 마가렛의 댄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흥미 있는 댄서야. 마치 불도저 같았으니까.”
듣고 보니 묘한 생각이 든다. 대처가 나중에 정치하던 그 자세가 바로 불도저였으니.
1945년이라는 해는 국민에게나 마가렛에게나 의미있는 한 해였다. 영국이 윈스턴 처칠이 이끈 대 독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으며, 전쟁 후 첫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마가렛은 옥스퍼드 선거구에서 입후보한 보수당의 퀸틴 호그(Quintin Hogg)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영국에서 선거운동이라면 호별 방문이 주류를 이룬다. 마가렛은 보수당의 강령과 후보자의 인적 사항을 쓴 팸플릿을 들고 옥스퍼드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자 그랜덤의 집에 돌아와, 역시 보수당 후보자를 지원하러 돌아다녔다. 이야기가 명쾌한 데다 옥스퍼드의 여대생이라는 점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의원 입후보자의 연설회에서는 입후보자가 나설 때까지 연설회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사람이 필요한데, 마가렛은 언제나 이 역학을 맡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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