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의 서울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묘사한 바로 그 무대였다.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도시로 도시로 밀려둔 젊은 사람들과, 평생 땀 흘려도 찌든 가난에서 벗어날 길 없던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거리는 늘 북적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값은 개 값이었다.
한편으로 서울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특수의 거품이 가라앉기도 전에 중동 진출의 새로운 바람을 타고 삶의 무대를 세계로 넓혀가는 전초 기지가 서울이었다.
내놓을 거라곤 좋은 머리 하나밖에 없는 한국인에게 신분의 수직 상승을 위한 발판은 졸업장 밖에 없었다. 악착같이 더 상급 학교로 진학하고 악착같이 배우려는 교육 제일주의가 주술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나는 다니던 고등학교마저 팽개치고 이 낯선 땅으로 올라온 것이다.
내 나이 열일곱이었다.
서울에서 내가 할 일은 우선 먹고사는 문제 해결, 그 다음은 돈 버는 일, 그 다음은 공부를 계속하는 일이었다. 내 또래 다른 아이들과는 거꾸로 된 인생 설계도였다. 그러나 서울에는 나 말고도 이렇게 인생의 시간표를 거꾸로 짜놓고 시작하는 청년이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일기장에 ‘거로’라고 내 아호를 지어 적어놓았다.
‘거로’는 ‘거꾸로’란 뜻을 담아 만든 말이다. 나는 지금 거꾸로 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거꾸로 된 삶을 바로 세워놓겠다는 강한 다짐이 내 아호 속에 담겨 있었다. ‘거로(巨路)’를 한자로 써놓고 보니 뜻도 마음에 들었다.
남들이 학교 다닐 나이에 돈벌이를 먼저 한다는 것은 분명 거꾸로 된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생각할 때 그것은 바른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거꾸로 사는 것도 언젠가는 바른 길을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돈벌이가 내 목적은 아니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
내가 삶의 목표를 돈벌이 자체에 두었다면 내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나는 먹고사는 일과 돈벌이가 아무리 급해도 ‘거꾸로 된 길을 바로 돌린다’는 U턴의 목표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 이 특별한 기억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삶의 원칙이고, ‘거로’라는 아호는 나 스스로 세운 이 원칙의 지표였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나는 이병철과 같은 재벌이 되겠다거나 그 무렵 율산 신화로 세상 젊은이들을 온통 들뜨게 한 신선호처럼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다.
내가 생각한 돈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와 같은 의미였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학원이 몰려 있는 종로를 찾아갔다. 마산에 있을 때 “학원에서 조교(지도원)로 일하면 수업도 공짜로 들을 수 있고 잘 하면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로에서도 제일 크고 유명한 강사가 많다고 소문난 학원에 무작정 들어갔다. 그러나 물어보니 학원 조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학력이 최소한 고졸이 되어야 하고, 면접을 통해 자격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면접의 기회조차 없었다.
내가 우습게 생각한 졸업장이 사회로 나가는 첫 관문에서부터 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일단 부딪쳐보는 거다.
발길을 돌려도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당당하게 내 소개를 하고 학원을 찾아온 취지를 말하자 학원측에서는 일단 면접을 보게 했다. 나를 면접한 선생은 나의 가장 큰 약점인 나이와 학력을 묻지 않았다. 그 선생의 사소한 실수 덕분에 나는 면접을 통과하여 그날로 유명 학원의 조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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