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벤을 향해 (8)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4-04 15: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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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봉(변호사) 譯 마가렛이 처음으로 하원의원에 입후보한 것은 1950년. 사회는 아직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25세며 미인이라는 신선한 후보자의 출현은 보수당 지지표를 50%나 증가시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산업지대로 노동자를 안고 있는 다트포드의 노동당 지지 층을 깰 수는 없었다. 노동당 노먼 도즈(Norman Dodds)가 38,128표를 얻었지만 보수당 마가렛 로버트는 24,490표에 머무르고 말았다. 패하기는 하였지만 그녀가 보수당 표를 50% 늘렸다는 점에 보수당은 매우 만족하였다.

1951년 11월 다시 총선거를 맞이했다. 이때도 마가렛은 다트포드의 보수당 신인으로 입후보했으나 노동당을 깰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보수당 표를 늘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 1949년부터 1951년에 걸쳐 마가렛의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선거에 나왔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남편 데니스 대처와 만나게 된 것이다.

마가렛은 보수당 입후보자로 선출된 직후 몇 번쯤 콜체스터에서 다트포드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늦게 다트포드의 선거구에서 콜체스터까지 돌아가려고 했을 때, 런던까지 자동차로 보내주겠다고 신청한 것이 데니스 대처였다. 데니스는 다트포드의 주민은 아니었으나 보수당원으로 다트포드에 사는 친구 보수당원의 선거를 도우러 와있었다. 데니스는 당시 36세의 독신 실업가였다. 독신이라 하더라도 실은 이혼 경험자이다. 제초제와 양을 씻는 세제 따위를 만들던 부친의 회사 ‘Atlas Preservative’의 전무였던 그는 제2차 대전 중에 마가렛 켐프튼과 결혼했다.

그러나 데니스가 대전에서 영국 육군 포병대에 들어가서 시실리, 프랑스를 전전하는 동안에 두 사람의 사이는 벌어졌다. 제대했을 때 “아내와 나는 남이 되어 있었다”고 데니스는 말했다.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1947년에 이혼했다.

독신인 그가 10세 이상 연하라고는 해도 아름답고 똑똑한 마가렛에게 호의를 보였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마가렛에게는 데니스와의 관계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메서디스트 가정에서 자란 마가렛에게 이혼 경력자와의 결혼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호의가 사랑으로 깊어짐에 따라 망설임과 주저함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에 대해서는 눈을 감기로 했다. 데니스가 이혼한 사실 따위는 일체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누구와 결혼했었는지, 전처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따위에 일체 관심을 두지 않은 척하였다. 그것은 결혼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자식들에게조차 아버지가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마가렛이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었을 때 매스컴이 남편의 과거를 보도하여, 처음으로 자식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식들로서는 쇼크였으나 사적인 일이 폭로된 것은 그녀로서도 쇼크였다. 왜 남편의 첫 결혼을 비밀로 했느냐는 신문기자의 질문에, “비밀로 한 게 아닙니다. 묻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요”하고 간단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마가렛에게 독립 자존, 근면이야말로 영국인의 바람직한 자세였던 것처럼, 그녀는 무슨 일에서나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녀에게 바람직한 가정이란 아버지 알프렛과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이루어 내었던 것과 같은 금욕적인 가정의 모습이었다.

아마 데니스와의 연애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서서히 친밀해짐에 따라, 결혼생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바람직한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렸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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