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열정적인 영어 강사와 저술가로 생활전선에 뛰어들 것인가.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뉴욕주립대까지 다녔으니, 사람들은 덩굴에도 열매가 열린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 정도면 됐다는 뜻이었을 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이쯤에서 학문의 줄을 놓을 수 없었다.
‘다시 도전장을 던지자, 그것도 하버드대나 컬럼비아대 국제학대학원으로!’
두 학교에서 모두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러나 합격을 해 놓고도 미국 사립대학의 엄청난 학비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모교인 뉴욕주립대에서 뜻밖의 제의가 들어왔다.
전액 수업료 면제에 매달 100만 원씩 장학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비리그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뉴욕주립대가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좋아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홍두깨에 꽃이 핀다더니,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에 한국에 있는 선배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니 책이 서서히 뜨기 시작한다. 공부고 뭐고 돈부터 벌어보자. 안 되겠니? 모든 건 기회야. 공부는 잠시 미뤄라. 돈 벌어서 다시 하버드대 대학원에 들어가면 되잖아.”
뉴욕주립대 학부 시절 틈틈이 쓴 영어교재 ‘Vocabulary Workshop’과 ‘Reading Workshop’이 국내 대학 시장을 석권할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영어 교재 시장에 한계를 느끼고 자립적 기반 위에서 영어 교재 국산화를 이루겠다는 포부와 더불어 영어 책 저술가로서의 ‘나’의 역할을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공부는 언제라도 다시 할 수 있지만 기회는 붙잡기 어렵다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짐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대학 특강 프로그램 전략과 ‘거로(巨路)군단’의 태동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쯤 지나자 내가 미국에서 쓴 영어 교재들은 판매 부수 100만부를 넘기며 한국 대학생의 필독서가 되었다.
나는 영어교재 저자로서 최고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전국 60개 대학 특강은 경영자로서 조직을 이끌고 이윤을 창출하는 실물 경제 개념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이때 만만찮은 체험을 하기도 했다. 이제 돈도 벌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대학 영어교재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자. 영어 교재만큼은 100퍼센트 국산화하고야 말겠다. 이는 대학영어 교재 저자로서 이름을 얻고 돈도 번 내가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나는 박사 과정을 연기하고 귀국했을 때 소망한 숙원 사업을 펼칠 기반이 마련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거로 워크샵 시리즈’를 기획해 5년에 걸쳐 Vocabulary Workshop과 Reading Workshop에 이어 TOEFL Workshop, Idiom Work shop, TOEIC Workshop과 60여 종의 자매서를 완간했다.
제작 비용만 20억 원을 투자한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그때 내가 기획해서 쓴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자 당시 서점주인들 사이에서는 나를 베스트셀러 제조기라고 불렀다고들 한다.
내가 만든 책들이 잘 팔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동안 대학 중심으로 특강을 해온 인지도 때문이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전국 60개 대학에서 수강생이 2만명이 넘을 정도였으니 그 시기에 강의를 받은 학생들이 수요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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