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싸이버대학교 초대학장(총장)에 오르다 (1)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4-16 16: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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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중국북경대학 연구교수) 2000년 10월18일. 이 날 한국싸이버대학교 학장 선거가 있었다.

초조함과 기대감 때문인지 다른 때보다 일찍 잠이 깼다. 나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가을 내음이 서늘한 새벽 공기에 실려 싸하게 코로 전해져왔다.

그 향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면서 나는 사색에 잠겼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살길을 찾겠다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말없이 기차역에서 배웅하시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굽이굽이 세월은 흘러갔고 한순간도 쉴 틈 없이 분주했던 그 세월을 살아온 나는 이 날 한국싸이버대학교의 학장 경선에 나갔다.

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예전에 기차역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으신 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오래 전 고향 역에서 어머니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견디셔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경선이 진행 중인 사무실에서는 팩스가 분주하게 팍팍한 기계음을 내고 있었다. 유권자들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개표하는 식이 아니라 재단의 이사이자 선거권자인 대학 총장들이 자신의 의사를 팩스로 표명하는 방식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선출 방법이라고나 할까? 나는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보수적인 대학 사회에서 비주류로 20여 년을 보냈다. 그리고 학계와는 거리가 있는 법조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더욱이 4년제 대학의 수장이 되기에는 너무 젊었다. 당시 내 나이 마흔이었는데 대학의 수장들은 대부분 60대였다. 내가 학장으로 선출될 가능성은 1퍼센트도 안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1퍼센트의 가능성을 믿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선에 나선 또 다른 후보는 모 대학 교무처장 출신의 중견 교수였다. 내가 그 교수를 제치고 학장에 당선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나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경쟁자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스스로에게 출사표를 낸 내 용기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팩스의 기계음이 멎었다. 드디어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헉’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내가 해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내가 당당히 학장에 당성된 것이다. 기차역에서 나를 배웅해 주시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경선이 있던 날 아침 말없이 그저 손을 꼭 쥐어주시던 어머니의 얼굴, 그 어머니의 얼굴에 함박웃음을 안겨줄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에도 희망을 걸고 도전한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감사했다.
한국싸이버대학교와의 인연을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2000년 8월, 밀워키 지방법원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한국에는 일자리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불평에 대한 내 생각은 다르다. 일과 일자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한국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아 무엇부터 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난감할 지경이었다. 마치 미국 개척 시대에 서부의 광활한 평원에 도착한 유럽인처럼 상상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수없이 눈에 보였다.

나는 우선 ‘한국협상법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본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은 분명 선진국 대열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분쟁이나 협상이 필요할 때 당사국으로서의 한국은 지식과 경험이 너무나 부족하여 미국, 일본, 중국, 유럽 국가들에게 번번이 당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협상 능력은 물론이고, 법규와 관례도 모르고 순진하게 나섰다가 낭패를 보는 정부 관료와 기업인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태를 바로잡아줄 창구가 필요했다. 그런 역할을 담당하도록 만든 것이 한국협상법학연구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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