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법학 교수라는 역할이었다.
대륙법을 기반으로 가르치는 한국 대학의 법학부에서 영미법을 전공한 내게 교수 자리를 제안해 오다니, 이건 분명 행운이었다. 미국에서 로스쿨 교수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것은 토크빌이 그의 저서 ‘Democracy in America’에서 밝힌 것처럼 ‘미국의 유일한 귀족 계급’인 변호사를 양성하는 전문대학원의 교수라는 지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수가 되기까지 길고 험난한 과정을 해낸 데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
둘째로는 사이버 대학의 매력이었다.
사이버 대학은 한마디로 미래형 대학이다. 한국의 대학은 개화기에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설립된 이래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육열을 밑거름으로 하여 양적으로는 이미 포화 상태를 넘어설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아직도 시험 상태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처방과 시행착오로 해방 후 무려 한 세기를 허비하고 있다.
컴퓨터와 통신 수단의 결합으로 막을 연 미래형 산업은 눈 깜짝할 새에 발전을 거듭하며 우리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놓고 있다. 삶의 바탕이 바뀌면 교육은 필연적으로 따라 바뀐다. 교육은 보수적이어서 가장 변화 속도가 느린 분야지만, 미래의 변화를 예감하고 준비한다는 대의명분이 힘을 얻으면 가장 빠르게 변하기도 하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지금 그러한 준비가 사이버 대학을 중심으로 급류를 타고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전화와 컴퓨터 보급률에서 세계 정상급이어서 이 두 가지 문명의 이기를 바탕으로 한 사이버 대학의 성공률도 다른 나라보다 높다. 그만큼 우리는 미래 세계를 지향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래의 국가 경영 또한 당연히 이 같은 문명의 도전이라는 선상에서 계획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옛 사람의 말에 ‘십 년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고(十年之計 種之以木) 백 년 계획으로는 덕을 심는다(百年之計 種之以德).’고 했다. 덕은 곧 교육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와 민족의 백년대계는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바로 교육이다. 그 백년대계의 한가운데 사이버대학이 움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학이 나를 필요로 하여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이 땅이, 이 나라의 미래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구나.’ 건방지게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명은 겁도 없이 설치던 10대 영어강사를 단련시켜 앞으로 닥쳐올 문명의 전도사로 써먹을 작정이었구나.’
이런 생각으로 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명을 다 던져 넣는 열정으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는 그 일을 만난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내 예감이 맞는다면 나는 우리 사회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셈이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지금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개인이 느끼든 못 느끼든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그 변화 속도 또한 눈이 어지러울 만큼 빠르다.
이쯤에서 진정으로 변해야 할 것은 상층부, 즉 정치 문화이다. 교육은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구태한 울타리를 허물어가고 있으나, 한국의 정치는 안타깝게도 봉건 시대의 꿈에 젖어 사회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학이 변화하여 사회의 구조를 흔들어놓으면 정치 또한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온갖 질곡도 언젠가는 광풍에 티끌 날리듯 말끔히 청소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상념들이 나를 즐겁게 했다. 주어진 일자리를 그저 밥벌이 삼는 사람과 주어진 일터를 더 큰 변화의 핵으로 활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늘 후자였다. 사이버 대학은 내 삶의 새로운 전쟁터였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