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노동당 의원이 연금을 올리려 하지 않는 보수당 정부의 ‘실정’을 공격했을 때 감연히 반박했다. 1946년, 1951년, 1959년, 1962년의 연금의 실질적 가치, 생활비, 부가가치세에 의한 국고 수입, 스웨덴, 덴마크 등 고 복지국가 연금과의 비교 등을 숫자를 들어 설명하고, 정부가 현재 연금을 지금 당장 올릴 필요는 없다고 단정했다. 설득력 있는 숫자의 분출에 회의장은 침묵했다.
그녀가 맥밀런 내각의 일원으로 전력을 다해 내각과 정부를 지켜내려고 노력할 무렵, 거꾸로 맥밀런 내각의 몰락이 시작된다. 1960년 맥밀런 수상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79%로 영국 역사상 최고로 인기가 있었다. 유머가 넘치는 웅변, 인간적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인품, 게다가 타협과 중재 재주가 뛰어난 정치적 능력에 의해 정치가 맥밀런은 ‘슈퍼 맥’이라 불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59년 유엔 총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은 맥밀런 영국 수상의 대소 비판 연설에 화를 내어 구두를 벗어서는 그걸로 책상을 두드렸다. 이 방약무인한 태도에 회의장의 각국 수뇌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그러나 단상의 맥밀런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통역을 향해 “저 러시아어는 잘 모르겠으니 통역해주시오”라고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착실히 신장하던 경제성장율도 미래에 희망을 주었다. 전승국이면서 식품 등의 물자는 배급제로 제한되고, 정치적으로는 대영제국의 붕괴가 진행되는 가운데 국민은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으나, ‘슈퍼 맥’의 출현으로 다시 과거의 영광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배반당했을 때의 반작용도 컸다.
경제 불황이 찾아오고 실업률이 늘어났을 때, 맥밀런은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이래 가장 인기 없는 수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지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체임벌린이라면 1938년 나치 독일과 뮌헨 협정을 맺어 ‘유화 정책’을 선택해서 히틀러가 미쳐 날뛰도록 허락한 장본인이다. 그 때문에 영국 국민에게서 가장 경멸 받은 지도자였는데, 불운하게도 맥밀런은 그 다음 위치에 놓인 것이다.
맥밀런은 경기 회복을 노려 정부 지출의 확대를 기획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큰 반대에 부딪쳤다. 그래도 인기 회복을 도모한 맥밀런은 지출 확대를 지지하는 자들로 내각을 굳히려고 대 개편을 단행했다. 흔히 말하는 ‘7월의 대 학살’이다. 학살당한 측은 당연히 맥밀런에 대해 심한 비판자가 되었다. 비판은 당내에서 당 바깥으로 확대되어, ‘슈퍼 맥’은 단순한 ‘맥’으로 전락했다.
국외의 정세도 급히 변하고 있었다. 맥밀런 내각은 영국연방의 맹주로서 유럽에서 고립되어 있었는데, 유럽의 여러 국가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만들었기 때문에 공동체 참가를 결정했다. 이미 대영제국이 쇠퇴하고 있었고 이제는 영국연방의 시대가 아니라 유럽과의 공존 공영시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길만이 앞으로 영국이 살아갈 길이었다. 맥밀런에 의한 영국의 살아남기 전략이었다.
그러나 야당인 노동당은 결사 반대였다. 유럽에 소속되는 것은 영국 역사에 결정적 오점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여론도 역시 노동당을 편들었다. 맥밀런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은 것은 1963년에 들어서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영국의 EEC 가입에 대하여 “노”라고 말한 점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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