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로의 길 (6)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5-20 16: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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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봉(변호사) 譯 듀칸 위원장은 다음날 매스컴을 피해 ‘1922년 위원회’의 비밀 회의를 열기 위해 자신이 오너인 런던 시내의 밀크 스트리트에 있는 상업은행 ‘케이저 아르망’으로 위원들을 소집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일을 진행할 작정이었으나, 밀크 스트리트에는 이미 저널리스트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위원 중 누군가가 누설한 것이다.

위원회는 “이날의 회합을 누가 매스컴에 누설했나?”로 시끄러웠으나, 그래도 회의에서는 “히스 당수에 대해 정식으로 당수 선거를 요구한다”는 결론에 달해 히스의 위원회 참석을 요구했다. 이 단계에서도 위원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히스 추방에 소극적이었다. 당수 선거는 히스의 당수로서의 지위의 안정을 위한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스컴은 ‘1922년 위원회’의 회합을 히스 추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전달했다. 그들은 위원회를 ‘밀크 마피아’라 부르며 당내 반란 집단으로 판단했다.

당수 선거 실시와 ‘1922년 위원회’ 참석을 요청 받은 히스가 불쾌하게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위원회에 대해 지금의 위원회는 구 의회의 의원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므로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위원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히스의 태도는 지위에 연연해하는 권력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인상으로 당내에 비쳤다. 그 완고한 태도는 리더로서의 적격성이 결여되었다는 견해를 조성했다.

당은 히스의 도전을 받아 일어섰다. 새 의회에 의한 ‘1922년 위원회’의 위원 선출 선거에서 구 의회와 완전히 동일한 멤버를 위원으로 선출한 것이다. 게다가 이 새로운 위원회는 위원장으로 전 위원장인 듀칸을 재선시켰다. 그러나 자신 말고는 보수당을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던 히스는 어디까지나 타협을 거부했다. 히스는 당내에서 고립되어 반 히스 분위기가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보수당에는 당수를 끌어내리기 위한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규칙이 요구되었다. 히스는 민주적 당수 선출의 규칙이 만들어져 최초로 선출된 당수였으나, 아이러닉 하게도 자신의 인퇴를 가능하게 만드는 규칙의 제정을 요청 받은 것이다.

히스에게 재차 당내의 신임을 받게 하겠다는 히스 지지 파나 히스 추방을 제창하는 반 히스 파나 당이 선거에 패해 야당이 된 경우, 신임 투표에 의해 당수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당 전체가 당수 선거를 실시하기로 굳어져 그에 저항하면 당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알게 된 히스는 어쩔 수 없이 더글러스 흄 경을 장으로 하는 당 규칙 개정 위원회의 설치에 동의했다. 새로운 당수 선거 규칙 덕분에 흄을 깨고 당수 자리에 앉은 히스는 이제 그 흄을 위원장으로 하는 10명의 위원회에 몸을 맡긴 것이다.

위원회는 당이 야당이 된 경우 매년 당수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제1회 투표에서 이기려면 전 유권자의 15% 이상과 다른 후보보다 15% 이상의 리드를 필요로 한다고 권고했다. 압도적 승리를 얻은 자가 아니면 리더는 될 수 없다는 규정이다. 이 권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히스는 마지못해 당수 선거의 실시를 승인했다. 투표일은 다음 해 1975년 2월 4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당내 의견에 마지못해 따른 히스의 태도는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어 그의 성망(聲望)을 다시 떨어뜨렸다.

히스에 비판적인 진영은 이미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선두는 키스 조셉이고, ‘1922년 위원회’의 듀칸 위원장의 이름도 거명되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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