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아니라 정치가라는 점, 다음 수상이 될 수 있는 야당 당수라는 점을 강조한 미국 여행은 대처의 외국 콤플렉스를 불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에서 정치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자신은 외국에서도 통용된다는 자신감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보수당의 입장, 그녀의 대소(對蘇) 관을 설명하고, “그녀는 정치가”라는 평을 받은 것이 외국에 대한 부담감을 없앴다고 해도 된다. “외국을 모른다”는 평가가 있었다고는 해도 대외문제에 대해 발언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모른다면 알려고 노력하겠다며, 그 노력 속에서 알아낸 것을 그대로 말하는 면이 과연 대처다웠다. 특히 대소 문제가 그랬다.
대처는 여성 당수로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외교에 약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외교문제에 대한 발언이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대처는 이전부터 소련의 위협을 세계에 알릴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헬싱키 합의 문서가 조인되고 1년이 지났는데, 소련의 인권이나 정보 공개에 대한 태도에 아무런 변화도 볼 수 없었다.
소련이 동구 여러 국가의 주권을 제한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자세를 바꾸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대처는 헬싱키 합의 문서 조인 후에도 여전히 군비 확장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975년 말 영국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 전체가 데탕트(긴장 완화) 무드에 젖어있을 때도, 대처는 대소 위협을 지적하는 연설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이때 대처는 당의 정책을 취급하는 ‘보수 조사국’과도 그림자 외무장관 레지널드 모들링(Reginald Maudling)과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을 같이 하는 스태프, 챌폰트 경, 패트릭 코스그레이브와 협의했을 뿐, 다음 해 1월 런던의 켄싱턴 타운 홀에서 연설하기로 했다.
대처가 외교문제에 대해 중요 연설을 한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갔다. 놀란 건 그림자 외무장관 모들링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대처가 자신에게 상의도 없이 대소 강경 발언을 해온 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모들링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동서 양 진영은 지금 데탕트 속에서 군축과 경제·문화 교류를 강화하려고 하고 있다. 동서의 화해는 이 파이프를 강화함으로써 한층 더 진행될 것이다. 지금 대소 대결 자세를 내세우는 것은 이 흐름에 역행하고, 유럽의 통일을 방해하여, 그 중에서도 미국의 발을 걸게 된다. 게다가 영국의 국론 분열을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
모들링은 75년 여름 ‘더 타임즈’ 지에 “영국 외교의 굵은 흐름은 정부의 교체에 의해 현저히 바뀌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것은 대처의 대소 강경 노선에 못을 박은 것이었다.
그런 경위도 있어 대처가 켄싱턴 타운 홀에서 연설하는 것을 알게 된 모들링은 그녀에게 연설 초고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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