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러헌의 계산은 먼저 노조와의 임금 교섭을 성공시키고, 경제를 호전시킴으로써 노동당 지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 다음에 선거에 임하겠다는 것이었다. 은밀하게 당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근소한 차이이지만 패배할 가능성도 있다고 나온 점도 캘러헌을 겁먹게 하였다.
캘러헌이 선거 연기 성명을 발표한 그 이후부터 영국의 국내 정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해산을 회피함으로써 지도력에 어두운 그늘을 보이기 시작한 캘러헌 내각에 노조가 도전해온 것이다. 정부는 임금을 일정 한도 내로 억제하는 소득정책을 도입했는데, 노조는 이것을 거부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친 겨울은 1926년의 총 파업이래 최악이라 할 정도로 파업이 빈발했다. 병원, 학교, 지하철, 청소조합 등 일상생활에 불가결한 부문에서의 파업이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부당하게 품삯이 억제되어 왔다고 보아 품삯의 50% 인상을 요구하는 묘파기 인부조합에 의한 ‘묘파기 파업’까지 등장했다. 이 때문에 유체를 묘지에 묻을 수 없어 자택에서 얼음과 드라이아이스에 담가 파업 해제를 기다리는 유족이 속출했다. 이에 편승하듯이 장의사조합이 관의 가격을 50% 인상했기 때문에 소동은 한층 더 확대되었다. 영국에서는 토장(土葬)이 일반적인데, 이 파업 덕분에 화장으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장례식마저 파업에 휘말렸으니 유족들이 캘러헌 노동당 정권을 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자유당이 노동당과의 정책 협정에 단념하여 의회 해산이 확실하다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한 1978년 여름, 대처는 선거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광고회사 ‘서치 서치’와 계약을 맺고 보수당의 이미지 업 작전에 나섰다. 연설 방식도 지금까지의 공격 일변도에서 타이르듯이 설득하는 절제된 방법으로 바꿨다. 복장도 딱딱한 것뿐만이 아닌 여교사와 같은 약간 서민적인 스타일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파업의 빈발로 노동당이 고경에 처했을 때, 캘러헌의 약점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준다는 태도를 취하도록 유의했다. 노동당이 몹시 난감한 상태일 때 오히려 국가를 구하는 어머니처럼 상냥하고 대범하게 행동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처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 영상에 신경을 써서 그에 맞도록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간 것도 선거 국민이 이미지에 좌우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현대적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텔레비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어필하려는 미국형 정치가는 아니었다. 의회에 텔레비전을 도입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반대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파를 만능으로 생각하는 타입의 정치가는 아니었다.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일면밖에 전달할 수 없는 전파에 오히려 불신감조차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작전에 자신을 맞추려 한 것은 어쩌면 그녀 속의 ‘여성’ 탓은 아닐는지.
대처는 정치가로서 여성인 점이 강조되면 반발했으나, 여성인 점을 이용하거나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었다. 자신이 ‘여성’으로 보이는 것 자체에 혐오감을 나타내는 경우도 없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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