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겨울 노동당은 파업의 속발(續發)로 지지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지방분권법에 대해서도 정부의 태도가 미지근해서 스코틀랜드 민족당이 정부 비판으로 돌아섰다. 자유당은 이미 노동당과의 정책 협정을 파기했다. 대처에게 호기 도래이다. 대처는 세 번째의 내각 불신임 안을 제출했다.
여야의 세력은 반반이었다. 쌍방 모두 전 의원의 출석을 요구하여 투표에 임했다. 여당인 노동당은 고령의 병자 써 알프렛 브로튼(Alfred Broughton) 의원을 들것에 눕혀 회의장까지 운반할 준비까지 갖췄다. 그러나 브로튼은 투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중태라 결석했다. 그의 결석은 불신임 안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찬성 311표/ 반대 310표
단 1표의 차이로 노동당은 역사적 굴욕을 당한 것이다. 불신임 안 가결에 의해 당시 수상이 그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1924년에 맥도날드(MacDonald) 내각이 볼드윈이 이끄는 야당의 불신임 안이 가결된 이래 처음이었다.
문을 계속 두드린 대처는 마침내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총선거를 향해 대처의 모든 것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이틀 후 현지 런던 핀츨리 지구를 자동차로 돌고 있던 대처에게 의회의사당에서 자동차가 폭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에어리의 자동차가 아니었으면” 대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 내각의 북 아일랜드 장관 에어리 니브는 북 아일랜드 과격파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처의 불안은 적중했다. IRA(아일랜드 공화군)보다 더욱 과격하다는 INLA(아일랜드 민족해방군)가 니브의 자동차에 폭탄을 장치한 것이다. 폭발은 의사당의 지하주차장에서 지상으로 나오려 한 지점에서 일어났다. 니브를 자동차에서 꺼내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한다. 니브는 아내 다이아나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한 후 포로 탈출 조직을 만들어 많은 군인을 구한 제2차 대전의 영웅은 자복(雌伏) 10여년 만에 대처 새 내각의 호프로 입각 직전에 그 목숨이 끊어진 것이다. 선거에 이겨 드디어 영국 재생의 길을 함께 걷고자 했던 대처에게는 통한의 일격이었다.
대처와 니브는 변호사 시절부터 친구로서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대처가 보수당의 당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니브의 작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처에게 니브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정계에서 유일한 “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또 한 사람 대처와 사상을 같이 하고 대처 당수 실현에 진력한 자로 써 키스 조셉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대처는 점차 조셉의 언동에 의문을 가지게 되어 히스 파라던 화이트로 부 수상의 판단을 오히려 중용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처가 화이트로에게 마음을 열기에는 그녀의 반 히스 감정은 너무 강했다. 역시 대처에게는 니브야말로 정책, 정치 판단, 인격의 모든 점에서 의지가 되는 스승이며 친구였다. 니브를 잃고 대처는 문자 그대로 한 팔을 잃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사건 당일 슬픔과 분노로 텔레비전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악마가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악마들의 승리를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이기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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