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이른 아침 이스라엘에서 급거 돌아온 캐링턴과 화이트로, 노트, 핌, 파킨슨 등에 의한 회의가 열렸다. 리치의 의견에 의거하여 기동함대 파견을 결의한 대처는 전군에 긴급 배비(配備) 계획에 의한 기동함대의 출항 준비를 명령했다. 긴급 배비 계획은 남 조지아 섬이 긴장화된 단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이때 레이건에게서 갈티에리와의 협의에 대한 결과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레이건에게서 갈티에리 설득 실패 소식을 받은 것은 그날 밤이다. 그러나 대처는 그 이전에 이미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간주했다.
내각 내나 외무·국방 양 부처 내나 기동함대 파견에는 회의적이었다. 첫째로 1만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섬이며, 게다가 주민이 겨우 1800명밖에 되지 않는 섬을 구하기 위해 국운을 걸어서까지 함대를 파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둘째로 영국에서 포클랜드까지 사이에 영국군이 사용 가능한 것은 영국에서 6,800킬로미터인 대서양상에 있는 어센션 섬(Ascension Island)이라는 작은 섬 기지뿐이다. 여기서 포크랜드까지의 6035킬로미터에는 머물 장소도 없어 공군기는 급유하면서 비행해야 한다. 공군기뿐인가 함대에 대한 보급도 불가능하다. 함대의 주요 함선이 손상 또는 격침되면 영국군은 괴멸적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때 대처의 대처다움이 발휘되었다. 지금이 “별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대처는 역사를 나아가게 하려면 싸우는 이외에는 없다고 결단을 내렸다. 대처는 반생 동안에 세 번의 결정적 찬스를 포착했는데, 포클랜드 분쟁의 결단이야말로 세 번째 찬스였다. 대처나 영국의 역사나 이 “별의 시간”에 크게 도약했다.
하지만 대처는 승산 없이 무모한 전쟁에 돌입한 것은 아니다. 영국군이 포클랜드를 탈환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비로소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전쟁 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몇 번인가 군 간부에게 물었다. 리치 해군작전본부장의 대답이 대처의 본능적 결단을 촉구했다고 해도 된다.
다음날2일 항공모함 1척, 구축함 4척, 양륙함 4척에 분승한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에 상륙하여 수도 포트스탠리의 총독부를 공격했다. 총독부의 수비대는 겨우 33명, 결국 헌트 총독은 항복하고, 총독부의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아르헨티나 국기가 게양되었다.
런던과 포트스탠리의 통신은 두절 상태로 되었다. 런던에서의 회선이 일시 회복되었을 때 런던은 포트스탠리의 전신전화국과 텔렉스로 이런 암호 비슷한 문답을 했다.
런던: 소문이 나고 있는데…. 포트스탠리: 새로운 친구가 많이 있다. 런던: 침공 소문은 어떤가? 포트스탠리: 그들은 내가 말하는 친구들이다. 런던: 상륙했나? 포트스탠리: 바로 그대로다. 런던: 교통은 중지되었나? 포트스탠리: 그에 대한 명령은 아직 없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야 한다. 런던: 누구의 명령인가? 포트스탠리: 새 총독이다. 런던: 아르헨티나인가? 포트스탠리: 그렇다. 런던: 아르헨티나가 지배하고 있는가? 포트스탠리: 그렇다. 겨우 1800명밖에 없는데 많은 해군 지원을 받는 몇 천 명의 부대와는 싸울 수 없다. 이 대화 후 “이대로 기다려” 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채 포트스탠리와의 회선은 절단되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