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5)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7-04 21: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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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봉(변호사) 譯 포클랜드가 아르헨티나 군의 공격을 받아 수도 포트스탠리가 함락된 것이 이 텔렉스 교신으로 확실했다.

그날 밤 대처는 각의를 소집하고 입을 열자 무겁게 힘을 담아 선언했다.

“신사 여러분,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대처는 영국이 무력으로 섬을 탈환할 것을 정식으로 선언했다. 이때의 대처를 어떤 스태프는 “수상이 된 이래 가장 위엄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대처로서는 전쟁은 자명했다. 각의에서도 대처는 전쟁의 옳고 그름보다 어떻게 이길지를 논의하고자 했다. 대처의 압력과 결의에 눌려 각의에서는 일체의 회의론이 모습을 감추고 전쟁 일색이 되었다.

4월3일 토요일, 정부의 요청으로 이례적인 회의가 열렸다. 토요일에 의회가 열린 것은 수에즈 전쟁이래 처음이었다. 긴급 의회는 대처에게 최악의 날이 되었다.

“왜 아르헨티나 군의 침공을 알 수 없었는가?” “왜 섬의 방위를 고려하지 않았는가?” “왜 함대 파견 준비를 좀더 빨리 하지 않았는가?” 야당에서 공격의 목소리가 일제히 높아졌다.

“사임하라”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처는 이렇게 선언했다.

“포클랜드 제도의 사람들은 영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섬의 주민입니다. 비록 수는 적어도 평화롭게 살고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선택하며 충성을 서약할 상대를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 양식이란 영국인이라는 것이며, 충성을 서약하는 상대란 영국 왕실입니다. 이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 영국 국민의 의사이며 영국 정부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며 전 하원의원들의 결의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원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웬 전 외무장관은 무언가 역사를 뒤돌아보는 영국인의 성격 그대로, “1660년대 메드웨이(Medway)의 굴욕에 필적한다”고 정부를 공격했다. 1667년 제2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 시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Thames) 강을 거슬러올라, 메드웨이 강의 채텀(Chatham) 항을 기습하여 영국 함선 4척을 불태우고영국 해군 기함 로열 찰즈 호를 빼앗아 달아난영국으로서는 굴욕적 사건을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에 비유했다.

정부 비판과 군사력에 의한 주권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소용돌이치고, 노트 국방장관도 사임하라는 야유에 쩔쩔매었다. 책임을 지기 위해 캐링턴 외무장관, 외무 담당 아트킨즈 국새상서, 루스 외무 담당 국무장관, 노트 국방장관이 대처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런 위기에서야말로 그와 같은 영국 외교의 정수를 모은 듯한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처는 알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허락한 이상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대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희생자를 낸다면 침공 징후를 파악했으면서 그것을 평가하지 않은 외무부에서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다. 대처는 어쩔 수 없이 캐링턴 외무장관 등 외무부 간부 3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노트 국방장관에게는 직접 책임이 없다고 보아 유임을 요청했다. 캐링턴의 후임에는 추밀원의장 겸 하원 원내총무였던 프란시스 핌이 옆으로 이동하여 맡았다.

4월5일 리치 해군장관이 보증한 것처럼 항공모함 “인빈시블(Invincible, ‘무적’이라는 의미, 1만9500톤)과 항공모함 “헤르메스(Hermes, 2만8700톤)를 주력으로 하는 영국 해군 기동부대가 포츠머스 항을 출항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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