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6)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7-05 2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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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봉(변호사) 譯 대형 구축함 ‘글라모건(Glamorgan), 앤트림(Antrim), 구축함 ‘셰필드(Sheffield)’, ‘코번트리(Coventry)’ 글래스고(Glasgow), 프리깃 함 ‘디도(Dido)’ ‘아리안데’ ‘오로라’ ‘유리나라스’ ‘프리모스’ ‘로스토프트’ ‘야마우스’ ‘릴’ 등이 뒤따랐다. 또 지브롤터(Gibraltar) 해협에서 훈련 중인 군함도 합류하여 제2차 함대로 출항하여 ‘제2차 대전 후 최대 규모의 함대 이동’이 되었다.

4월5일 포츠머스 부근은 영국에는 드물 정도의 맑은 하늘이었다. 항구에서는 작은 영국 국기를 손에 쥔 시민들이 함대의 출항을 전송했다. 사지로 향하는 비장함은 없었고,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는 밝고 흥겨운 분위기가 떠돌았다. 록 가수, 로드 스튜어트의 유행가 ‘I am sailing’이 최대 볼륨으로 흘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출항 명령에서 겨우 4일 후의 출항이다. 무기, 탄약, 식량, 텐트 등 몇 천 명 분을 조달하여 싣는다. 휴가 중인 대원들도 즉시 소집되었다.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창 피로연 중에 소집 전보를 받고 그대로 귀국한 정보사관도 있었다.

이 정도의 대 함대가 이 정도의 짧은 시간에 싸우러 향한 예는 이전에 없었다 해도 된다. 일본의 자위대 관계자도 그 스피드와 능숙한 처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국인은 일단 급할 때는 놀랄 정도로 결속하여 힘을 발휘한다는데, 포클랜드 분쟁의 발발은 바로 ‘일단 급할 때’였다.

함대의 출항 준비에 맞춰 영국이 자랑하는 호화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 2세’ 호나 ‘캔버라(Canberra)’ 호도 징용되어, 헬리콥터 갑판이 붙은 병사 수송선으로 변신했다. 화물선 ‘아틀랜틱 컨베이어(Atlantic Conveyor)’ 호도 징용되어 전투기 해리어(Harrier)를 운반하는 군용선으로 변했다.

제2차 대전 후 세계 최대의 함대는 약 20일 만에 포클랜드 제도 주변에 도착하여 5월 1일 포트스탠리 공항 공중 폭격으로 영국 아르헨티나 군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쌍방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된다.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를 침공한 직후 의회에서 오웬 전 외무장관이 ‘메드웨이의 굴욕’을 거론하여 정부를 비판한 것은 이미 기술했다. ‘국가의 위신’이 상처 입었을 때 영국이 반응하는 방식의 단적인 예이다. 캐링턴을 대신하여 외무장관이 된 핌은 첫 의회 연설에서 “영국은 독재자와는 유화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을 히틀러와 비교했다. 히틀러와 유화 정책을 취했던 체임벌린 수상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소신을 역사의 교훈의 인용에 의해 보여준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 영국의 위신, 영국인의 역사를 오산했다.

영국이 홍콩과 같은 조차 방식을 제안하거나 쇄빙 패트롤 함 ‘인듀런스’를 끌어올린 것도 아르헨티나 측의 오해를 부르는 원인의 하나였다. 이런 영국의 일련의 움직임에서 아르헨티나는 영국에게 포클랜드 사수의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영국도 아르헨티나를 오해했다. 1816년에 스페인에서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의 권익을 물려받는다고 하여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영국의 포클랜드 점령을 식민지 지배로 간주하고, 제1차 대전 후나 제2차 대전 후나 강력히 반환을 요구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독립 전 1806, 7년의 두 번에 걸쳐 아르헨티나를 침략하려고 하여 실패한 역사가 있다. 아르헨티나로서는 반 식민지주의는 국가의 통일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제2차 대전 후에밀양역에 내리자, 한적한 역사 안에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 ‘밀양’의 스틸 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콩나물 해장국을 시킨 뒤,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창밖으로, 그 부근이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은 곳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보였다. 책에는 ‘밀양’이라는 글씨가 흘림체로 적혀 있지만 오른쪽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원제 ‘벌레 이야기’’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논문 발표가 끝난 뒤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영화 ‘밀양’ 이야기가 나왔다. 지방 유지는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였다. 영남루가 굽어보는 강물 빛을 시작으로 이루다 손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고향 밀양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 영화는 하나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의 국립대학교에 재직하시는 교수님은, 영화의 완성도가 매우 높고 영화감독의 해석에 뛰어난 면이 있다고 변호하였다.

기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택시를 집어타고, 국도 1번의 고불고불한 도심을 빠져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날 내가 논문에서 다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는 정통 교학의 틀에 머물지 않고 불가와 도가까지 통섭하였으며, 걸출한 시인 최성대(崔成大)와 골동서화 감평가 김광수(金光遂) 등과 교유하여 18세기 문화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일본 여행록인 ‘해유록’과 사명당 유정의 활약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남긴 것은 새삼 그 공적을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신유한의 ‘해유록’은 한계가 없지 않지만, 일본 풍속과 정치제도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뒷날 정약용은 신유한의 ‘문견록’이 산천과 풍속을 기록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본의 관방(關防, 국경 수비)과 도리(道里)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의당 관찰해야 할 것은 오직 기물(器物)의 정교함과 여러 가지 조련하는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이 생략되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정약용은 신유한이 일본 에도 지방의 기후에 대해 서술한 내용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신유한은 이렇게 적었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쪽으로 3000여 리를 가면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에 이르고, 또 다시 동북쪽으로 1600리를 가면 강호(江戶, 에도)에 이르는데, 강호의 북쪽은 바로 야인계(野人界)에 이르게 된다. 야인과 더불어 그 남북이 동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강호는 우리나라의 육진에 해당된다. 그러나 동방은 해와 달이 뜨는 곳이라 가장 따뜻하다. 그러므로 10월에도 춥지 않아 마치 우리나라 삼남의 9월 기후와 같다.”

정약용은 “그곳 10월 추위가 우리나라 남방 9월 기후와 같다면 분명 그 땅은 우리나라 남방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에 있음이 증명되니, 어찌 서수라(西水羅, 함경북도 경흥군에 있는 우리나라 동북쪽 항구)와 서로 대치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공은 시인이다. 오직 풍월이나 읊는 것으로 호기를 부리는 사람인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육합(六合)이 서로 얽혀 운행하는 이치는 전혀 모르고 남에게 기만을 당하니, 아아! 참으로 통탄스러울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신유한이 정약용의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작가 서문에서 이청준은, “졸작 ‘벌레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작품을 쓰기 얼마 전 서울의 한 동네에서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밀양 분의 말씀대로, 영화 ‘밀양’은 밀양같이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을 무대로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듯하다. 하지만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의 계시를 중시하는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표기 한자만을 보면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밀양’이라는 지명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법도 하다.

고장 분들이 말씀하듯, 정말로 밀양의 본 모습이 영화 ‘밀양’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밀양을 위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는 포클랜드 제도의 문제로 영국 식민지주의에 대한 반발이 국민들에게 스며들어 있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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