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기반인 영호남에서의 압도적인 영향력 차이 때문에 더 왜소해 보이는 미니정당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창당 직후부터 골리앗에 덤벼드는 다윗의 기세로, 구태정치라는 불의에 저항하는 정치적 의인들의 자세로 국민의 마음을 얻어나갔다. 처음 10% 미만에서 출발한 지지도는 2004년 3월 초, 이미 한나라당까지 추월해 40%대에 도달할 정도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3월11일에 있었던 대통령 탄핵 강행은 4월 총선을 앞두고 영호남의 텃밭까지 위협당한 한나라당-민주당 구정치 연합세력의 사활적 반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격은 심지어 주권자로서의 국민의 자존심마저 망가뜨린 정치적 폭거였으므로 분노한 국민들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애초의 기대보다 훨씬 큰 성과인 152석의 의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세력이 국회제1당과 과반을 동시에 차지한 역사적 쾌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이처럼 정치적 후폭풍에 의해 달성된 지나친 승리가 열린우리당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정당으로서 채 기초와 중심이 잡히지도 않은 신당이 국회에서의 개혁적 입법 과제 실현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당정분리 및 새로운 정당 건설의 실험까지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 과욕이었다. 더욱이 당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철학, 이념으로 동질화된 집단이 아닌 상태에서 친노를 포함한 주도세력들은 의욕만 앞섰지 정치적으로는 미숙한 집단이었다. 그리하여 열린우리당은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당 안팎의 부정적 평가가 축적되어 스스로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물론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환(連環)돼 있던 열린우리당의 숙명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지난 연초에 당을 일찌감치 박차고 나간 사람들은 이 문제를 거의 유일하게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어떻든 국민들 입장에서는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달랐다. 내가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던 것은 대통령 때문이 아니었다. 내 정치 생명이 끝장나는 한이 있더라도 지역주의정치를 청산하고 싶었고 합리성, 민주성이 관철되는 애국적인 정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같은 이의 항변이야 어떻든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만든 위성정당이라고 낙인찍고 있었고, 대통령의 주도권 행사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는 점에서 별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열린우리당 실패의 가장 앞자리에는 대통령의 책임이 기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정리해 놓더라도 남는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결단코 그렇지는 않다. 국회의원들, 특히 당의장과 원내대표 등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내탓이오’를 외치며 통회하고 나서야 했다. 그렇지 못하고 다들 남탓을 하며 뛰어내릴 때 열린우리당이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내 몫의 책임을 감당할 방법을 찾느라 애쓰면서 오욕의 시간을 감내했다. 마지막 지도부의 최고위원과 사무총장을 겸임하면서 신당과 합당 협상을 하고 당의 문패를 내리는 책임자 역할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제 합당으로 일패도지의 기류를 막고 다시 한번 한나라당과 일전을 벌일 최소한의 교두보는 마련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아주 원칙적으로 말해서 이런 식의 당의 소멸과 합종연횡의 정치가 소망스럽지 않다는 점은 그래도 남는 회한이다. 그리하여 이제 갓 사망한 열린우리당에 대해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으로 나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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