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혹 돈 많은 재력가가 구입했다고 하더라도 보관이 힘들다. 결국 은행 안전금고에 깊숙이 숨겨놓는 수밖에 없는데 경비가 잘 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도 심심찮게 도둑을 맞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수근이나 이중섭의 작품을 모사했다가 감옥에 간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3국에서는 그림 말고도 ‘글씨’를 귀중한 예술품으로 쳐준다. 당대의 명필로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의 작품은 부르는 게 값이다.
서도, 서예, 서법이라고 나라마다 달리 부르지만 붓글씨를 기본으로 한 이 서예작품은 전문서예가가 아닌 유명인사의 작품이 더 값나가는 수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과 김대중을 들 수 있다. 그들의 글씨가 어느 정도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논외로 하자. 다만 그들의 작품 한 점은 한창 인기가 좋을 때 제법 크게 호가되었다.
정치인 중에서 명필로 소문난 이는 운제(芸濟) 윤제술이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간재 문하에서 공부했고 동경고사(東京高師)를 나와 남성학교 교장을 하다가 정치에 투신하여 국회 부의장을 지낸 분이다. 말년에 양일동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만들어 유신반대운동에 나섰다. 필자가 신군부에 구속되어 감옥을 살다가 나와서 인사를 가니까 즉석에서 격려 작품을 써주기도 했다. 명필이지만 김영삼, 김대중의 작품보다 값은 떨어졌다.
이처럼 정치인들의 작품은 명필이나 달필보다는 글쓴이의 유명도가 더 인기를 좌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세정치인에게 잘 보이려는 군상이 언제나 대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선거 때가 되면 공천을 따내야 하고 집권자가 되었을 때는 한 자리 얻어 하기위해서 그들의 환심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일부에 불과한 얘기지만 유명 예술인 중에도 좋은 서예작품을 남긴 이들이 많아 후학들이 즐겨 간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뜬 분들의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인이나 소설가 중에는 붓글씨는 안 남겼어도 육필원고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귀중하게 취급된다.
그런데 필자는 얼마 전 원음예술사 고춘남 사장이 소월(素月) 김정식의 친필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랑을 듣고 깜짝 놀랐다. 소월의 시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서정을 자극하며 그 아름다운 시구에 취하게 만든다.
그는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다녔다. 그와 함께 학교를 다닌 사람으로 백석(白石) 시인이 있다. 그들의 스승은 안서(岸曙) 김억이었다. 김억 시인의 지도를 받으며 소월과 백석은 나란히 시를 썼다. 소월은 서른셋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만 백석 역시 일찍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눴다는 여인이 서울에서 큰 돈을 벌어 죽을 때 법정(法頂)스님에게 모두 기부했다는 얘기는 하나의 미담이다.
3000억에 달한다는 재산 전부를 법정은 하나도 차지하지 않고 길상사로 만들었으니 가히 무소유의 스님답다. 얘기가 곁가지로 흘렀지만 소월의 글씨는 문인다운 필체를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썼다. 더구나 스승인 안서의 시 삼수갑산(三水甲山) 전문을 쓴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보인다. 생전에 소월이 가장 존경한 사람은 안서 김억 선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니 그 정성을 엿보게 한다. 옛 맞춤법 그대로다. 일부를 옮겨보자.
삼수갑산 내‘ 왜 왓노 삼수갑산이 어듸뇨 오고나니 奇險타 아아 물도 만코 山 협협이라 아하이 내 故鄕으로 돌우가쟈 내 고향을 내 못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아… 三水甲山 이 어듸뇨 내가 오고 내 못가네 不歸로다 내 故鄕아 새가 되면 떠나리라 아하하 님게신곳 내고향으로 내 못가네 왜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아 三水甲山이 날 가둡엇네 아하하 내고향으로 가고지고 오호 三水甲山 날 가둡엇네 不歸로다 내몸이야 아아 三水甲山 못버시난다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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