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의 아베-후쿠다, 2008년의 이명박-박근혜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8-06-12 19: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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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정치칼럼리스트, 시민 네티즌 포럼 집행위원) 2007년 9월, 일본에서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2006년 8월 역대 최고 지지율로 총리에 선출된 아베신조(安倍晉三)가 1년 만에 돌연 사임한 것이다.

아베의 사임은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2007년 7월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37석을 얻는데 그쳐 60석을 얻은 민주당에게 제1당 자리를 물려주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되었다. 둘째, 설익은 정책과 무소신 언행으로 인해 70%를 넘어섰던 지지율이 28%까지 추락했다. 셋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를 기록한 이후 자민당 내 원로 3인방 (야마자키-고가-가토)이 ‘후쿠다 구원투수’ 시나리오에 합의했다.

2007년 9월의 일본 정국은 마치 2008년 6월의 한국 정치권의 예고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최고 지지율을 얻은 이명박 정권이 지지율 80%대에서 10%대까지 급전직하 했고, 지난 4일 실시된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충격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내 원로그룹이 잇따라 ‘박근혜 구원투수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위기가 1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재연되었지만 위기 대응 과정은 판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 보수 지식인들은 아베 정권의 몰락이 일본 보수세력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극도의 위기감 속에 ‘포스트 아베’에 대한 논의를 급진전시켰고, 자칫 민심의 ‘총알받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후쿠다야스오(福田康夫) 전 자민당 간사장은 출마의 결단을 내렸다. 때마침 일본 보수언론들은 ‘민심 속으로’를 외치며 ‘후쿠다 구원투수’의 당위성을 부각시켰으며, 일본 정국은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이와 상당히 다르다. 한국 보수 지식인들은 이명박 정권의 몰락이 보수세력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투수’로 거론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 측이 “총알받이가 되라는 이야기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선-중앙-동아의 논조도 하루가 다르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보수 지식인이나 보수 언론이 보수의 정체성이 아닌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신흥권력에 ‘올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보수 세력 내에서 “이제라도 보수의 정체성을 찾자”는 측과 “이명박이 미덥지 못하더라도 지지하자”는 측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보수를 살리기 위해 이명박을 굴복시켜야 되는 상황에서 이명박을 살리기 위해 보수를 동반 몰락시키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 보수 세력이 겪고 있는 위기는 바로 ‘신뢰의 위기’다. 100만 명에 육박하는 일반 시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표면적 이유는 ‘미국산 쇠고기’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거짓말, 위장, 기만, 부패, 오만, 독선, 왜곡 등 그동안 보수 세력이 보여준 파행에 대해 총체적으로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확인시켜준다고 해서 촛불이 꺼지기 어렵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과 보수 세력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실, 공정, 투명성, 설득, 합의, 절차 등 민주주의에 불가결한 요소들을 진정성 있게 제시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쇠고기 재협상’과 ‘대운하 포기’다. 이러한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을 경우 박근혜가 책임총리로 갈 수도 없거니와 혹 간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적쇄신’과 ‘친박복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보수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이명박 통치스타일이 진짜로 바뀌었는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종이’로 간주하고 있다. 박근혜 세력조차 포용하지 못하면서 야당과 촛불 든 시민들을 포용하겠다는 것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적쇄신에서 어떤 인사들을 중용하느냐에 따라 청와대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또 다른 ‘고소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일본에게 후쿠다가 있었듯이 한국에는 박근혜가 있다. 그가 70년대 ‘아시아 속의 일본’을 실천했던 후쿠다다케오 전 총리의 아들로서 일본 보수 세력의 적통을 이어왔듯이 박근혜 또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로서 한국 보수 세력의 적통을 이어왔다.

이명박 정부와 보수언론이 진정으로 ‘민심 속으로’를 실천할 수 있다면 한국 정치 또한 ‘박근혜 구원투수’에 힘입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에서 아베 전 총리는 ‘사임’으로 보수 혁신의 물꼬를 텄지만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하야’라는 극약처방은 현실적으로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사임’에 준하는 자기반성과 인적쇄신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전제되어야 이명박도 살고, 박근혜도 살고, 한국 보수 세력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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