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영이 “선거로 뽑힌 대통령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은 낯 뜨거운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에 탄핵심판을 당했고, 그 후로도 임기 내내 보수단체의 사퇴 요구에 시달렸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보수단체가 시청 광장에서 개최한 많은 집회에 자주 등장한 구호는 ‘노무현 정권 퇴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엄연히 선거로 뽑힌 대통령인데 말이다.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자주 일어난 나라로는 필리핀을 뽑을 수 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각종 스캔들에 시달리다가 2001년 1월 피플 파워에 굴복하고 사임했다. 에스트라다에 이어 대통령이 된 현 대통령 아로요에 대해서도 사퇴 운동이 일고 있다. 선거로 뽑을 때는 언제고, 물러나라고 할 때는 또 언제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에 대해 사임을 요구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6.25 남침(南侵)이 발생하자 신속하게 미군을 파병해서 우리나라를 구한 트루만 대통령은 재임 중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으로 뽑힌다. 그런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자 지지도는 20%대로 추락했다. 트루만 행정부가 공산주의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불만이 많았던 공화당은 맥아더 해임을 호기(好機)로 보고 공격을 퍼부었다. 공화당 당내 보수파의 리더인 로버트 태프트 의원은 트루만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조지프 마틴은 트루만이 사임해야 한다고 몰아 붙였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자 맥아더를 해임한 조치가 정당했다는 여론이 일었고, 트루만의 지지도는 다시 30%선을 넘겼다. 하지만 트루만 대통령은 임기 중 한국전쟁을 종료시키지 못했고, 그의 지지도는 퇴임할 때까지 30%대 초에 머물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1974년 8월에 사임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상원에서의 탄핵심판을 앞두고 타임지(誌)는 창간 후 최초로 ‘대통령은 사임해야 한다’는 제목의 명(名)사설을 실었다. 공화당의 중진 의원들이 백악관을 방문하여 사임을 권하자 닉슨은 이틀 후 사임을 발표했다. 닉슨은 휴 스코트 상원 원내대표,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등 당내 중진의원들의 충정(衷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탄핵과 사임 압력에 시달리던 재임 중 마지막 한 달 동안 닉슨 대통령의 지지도는 24%란 최저수준에 머물렀다.
섹스 스캔들과 이에 대한 위증으로 탄핵심판을 당한 클린턴 대통령도 사임 압력을 받았다. 공화당의 몇몇 강경파 의원들이 클린턴이 사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천성(天性)이 뻔뻔한 클린턴이 사임할 것으로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화당 중진들은 만일에 클린턴이 사임하면 부통령이던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러면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현직 대통령 앨 고어를 상대로 한층 더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9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석을 상실하자 뉴트 킹리치 하원의장은 사임했고, 상원은 클린턴에 대한 탄핵심판을 부결시켰다. 탄핵 절차 도중에도 클린턴은 지지율 50%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클린턴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직후에는 한때 지지도가 90%에 달했지만 2007년 후로는 30%대 초반을 유지하다가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서서히 지지도가 하락하더니 최근에는 28-29%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지속적으로 35%를 밑돌면 정상적인 임무 수행이 어렵다고 본다.
노무현, 최장집, 황석영 등 ‘진보 군단(軍團)’의 ‘이명박 사임 불가론(不可論)’은 묘한 정치적 함축성(含蓄性)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에 유고(有故)가 발생하면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면서 60일 내에 대선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은 전임자의 잔여임기가 아닌, 새로운 5년 임기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진보 군단’은 이명박 정권이 ‘지지율 20% 짜리 정권’으로 5년 동안 계속 남아주어야 민주당이 전열(戰列)을 정비해서 2012년 대선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이 대통령이 사임이라도 하면, 이렇다 할 확실한 차기 주자(走者)가 없는 민주당은 60일 내에 치러야 하는 대선에서 또 다시 패배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진보진영의 ‘대통령 사임 불가론’은 그런 고민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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